사는 이야기

중국여행 -짜가나 마을

아르쎄 2017. 7. 16. 15:10

7월 4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식사도 않고 짜가나 마을로 향했다.
가늘 길의 산세가 거세어진다. 하늘과 맞닿을 듯한 산들 사이로
꾸불꾸불 흐르는 개천을 따라 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짜가나 마을 도착.
가장 가까운 식당에서 "빠오즈"와 쌀죽으로 아침식사로 했다.


우리가 흔히 만두로 잘못 알고 부르는 중국 음식이 세가지가 있는데, 빠오즈, 자오즈, 만토우 가 그것이다.

"빠오즈"는 둥글게 빚은 빵에 속을 넣은 것으로, 피는 약간 부풀어 올라 빵같은 느낌이 나는 것을 일컫는다. 
"자오즈"는 손자국 나게 길죽하게 빚은 것으로 자오즈와는 다르게 매끈한 피의 느낌이 우리의 송편과 비슷하다.
그리고 만토우가 있는데, 길게 만든 밀가루를 돌돌말아 찐 것으로, 특이한 것은 속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만토우(만두)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 잘못 전해지면서, 자오즈,빠오가 모두 만두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식당의 일을 거드는 애들이 한국인을 언제 봤는지 한국말을 흉내내며 장난스럽게 시비를 한다.


식사를 하고 산에 갈 채비를 했다. 애초 출국할 때는 산에서의 1박을 예상하고 텐트와 버너, 침낭을 비롯한 장비를 챙겨왔지만, 시간 상 산에서의 비박은 불가능하게 되어 물과 카메라만 대충 챙겼다.

식당옆 가게에서 물을 사려 들렀는데,  아까 식당의 애들이 쫓아들어와서 가게 주인에게 '얘는 한국사람이니 잘 챙겨주라'는 등  참견을 한다.


물을 두 개 사가지고 짜가나 산에 들어섰다.
입구에는 장족 아낙네들이 말을 타고 가라며 호객을 한다.


약을 먹어 나아지긴 했다지만 여전히 아직 고도에 완전히 적응된 건 아니었다. 시작부터 머리가 약간 띵한 생태.
그렇다고 더 악화될 거 같지는 않았다. 호흡을 크게 하며 한발한발 천천히 올랐다.


오르는 길에 대 여섯 살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아이가 생화 목고리를 팔고 있었다.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값이 얼마든 선물해 주고 싶을 만큼 예뻤다.



오르던 길을 돌아서서 짜가나 마을을 돌아다 보았다.
하늘로 높게  솟구친 산을 병풍삼아 산 중턱에 걸터앉은 마을의 모습이 어느 그림에선가 본 것처럼 운치가 느껴진다. 

소리내어 흐르며 계곡을 거슬러 오르자 커다란 바위가 길 양편을 문주 처럼 감싸고있다. 
 "티엔씨먼"이다. 여기서 부터 산행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짜가나 산의 문과 같은 곳이다.
 산에서부터 내려온 물이 이 곳을 지나 폭포처럼 빠른 물살로 아래로 쏟아진다.


거대한 바위산들 사이로 계곡을 따라난 길을 걷는다.






오르는 중에, 이미 말을 타고 하산하는 등산객들을 마주쳤다.

첨엔, 사치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타고 산길을 걷는 것도 그 나름의 맛일 수 있는 생각이 들었다.


한 쌍의 중국인이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부부냐고 묻자 아니라고 했다. 여자는, '남자의 아내는 힘들다며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고
어쩌다 보니 둘이서 동행하게 됐다'고 한다.

결혼했냐고 묻자 자기 전 남편은 일본인이었는데 지금은 혼자란다.


잠시동안 그들과 동행하다가 이동하는 속도가 답답해서 인사하고 앞서서 걸었다.


경쾌해 보이는 한 여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내게 뭐라고 말을 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무슨 왕의 무덤이 나온다는 것이다.
얘기하는 사이에 카메라를 든 한 남자가 그녀를 뒤쫓아왔다.

둘이 잠시 잠깐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여자가 한숨을 쉰다.
자기가 본게 그 무덤이 아니라나.

잘됐다 싶어 수작을 했다. 나랑 같이 다시 올라가서 보고 오자고.


그게 바랐던 대답인지 그녀는 푸념하는 듯한 표정을 하며 되돌아 섰다.
오르는 동안 그녀는 이런 저런 수다를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광동에서 단체로 놀러 왔는데, 아까 그 남자는 늦잠자고 게을러서 늦게 나왔다는 둥 오는 길이 어쨌다는 둥...
얘기하는 모습이 귀엽다.




타르쵸가 걸쳐진 바위가 있는 곳을 지나 한참을 더 걸었지만

그녀가 찾고자 하는 어느 왕의 무덤은 찾질 못했다.


귀엽게 한숨짓는 그녀에게 일행과 너무 멀어지니 그만 내려가길 권했다.

함께 사진을 찍고 웨이신 아이디(쥔)를 나누고는 작별인사를 했다.


헤어지고 언덕을 오르는데 그녀가 저 아래에서 소리치며 뛰어오고 있었다.
아까 사진찍다가 내 물병을 챙겼었는데 내게 다시 주는 걸 깜빡하고 그냥 들고 갔던 것이다. 

그녀가 내 물병을 들고 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물이 두병씩이나 필요할 거 같지 않았고 그 애가 가져가는게 아깝진 않았기에 돌려달란 말을 구태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다며 그냥 가지라고 몇 번을 소리치자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 손을 크게 흔들고는 돌아섰다.






몇시간을 걸었는지, 계곡이 시작하는 쪽 방향으로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야 할 때가 된건가?


저 앞에서 또다른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다가가니 반가운 녀석도 있었다.

아까본 그 강아지가 그들 옆에 누워 뒹굴고 있었고 여자는 그 강아지의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고는 옆에 앉았다. 옆에는 입장권에 인쇄된 약도에 그려진 폭포가 보였다.

예의 농을 그들에게도 던졌다. 여자에게 '옆에 앉은 사람이 남자친구냐'고.
여자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아래쪽과는 달리 바람이 쌀쌀했다. 방풍복을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허리색에 걸고 왔던 방풍복을 걸쳤다.


셋이서, 내려갈지 말지를 논하다가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고 합의 했다.


두 남녀의 속도를 따라 갈 수 없어서  뒤쳐져서 걸었다.

그놈의 고산병이 문제였다. 조금만 힘을 쓰면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들은, 뒤쳐지는 나를 기다렸다가 다가가면 다시 앞서 가기를 반복했다.





야생화가 보기좋게 어우러져 핀, 관목이 펼쳐진 구릉을 지나자
장족 유목민 텐트가 나타났다.


그들에게 스린(석림)이 어디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한어(중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한 남자가 이쪽으로 오더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왔던 길로 내려가는 길과 산을 돌아서 내려가는 길, 각각의 걸리는 시간을 물어봤다.
왔던길로 내려가면 두시간, 돌아서 내려가면 네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을 돌아서 내려가는 길은 위험하니 왔던길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고산병 증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객기가 발동한 나는 길도 모르면서
돌아서 가는 길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그 길을 가르쳐준 장족남자가 뒤쪽에서 소리친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 이라니까!"
그가 가르쳐준 대로 다시 방향을 고쳐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 멀리 넘어야 할 고개가 보인다.
컨디션을 유지하며 저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호흡을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또한, 어두워지기 전까지 내려가야 하기에 마냥 호흡 조절에만 신경쓸 수는 없다.


저 아래 올라왔던 계곡에는, 아까 두 사람이 되돌아 내려가는 모습이 아주 작게 보였다.

나는 큰 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나를 응원하듯 그들은 돌아서서 손을 크게 흔들어 주었다.




수목이 자라지 않은 산에 여러 바위가 마치 나무처럼 삐쭉삐쭉 솟아있다.
저게 석림(스린) 즉, 돌숲인가 보다.


걷다보니
여기저기 사람 머리통만한 구덩이가 뚫어져 있는게 보였다.
분명 여기도 어떤 녀석들의 집임이 틀림없다.
저 아래 강아지 같은 애들이 내 인기척에 놀라 마구 뛰어가더니 구멍속으로 사라진다.
토굴집 주인인가 보다. 


나보다 그리 높지 않은 바위산위에 아직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넓게 펼쳐진 풀밭사이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간 구릉에서도, 저 가파른 산 비탈에서도
소들은 풀을 뜯고 있었다.


고갯마루에는 잔 풀과 야생화가 군데군데 피어난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소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야영을 하게 되면 소똥을 연료로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버리고 간 녹슨 이소가스통이 보였다. 산에 와서 야영하는 것은 나 또한 즐기는 바이지만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은 권장할 것이 못되리라.


내려가는 길은 마치 스머프 마을같은 몽환적 분위기에,

시간에 쫓김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정취에 빠지 수시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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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한참을 그렇게 내려오자,
바위산 아래의 초지에 천막집이 있었고, 그 앞에 한 사람의 남자와 두 사람의 여자가 보였다.



남자는 뭔가를 들고 말에게 다가가고 있었는데, 말은 그걸 자기에게 지우는 게 싫은 지 옆걸음질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손마이크를 하고는 '내려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었다.
남자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내려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대화가 될 만한 거리에 이르자,

남자는 자기도 마을로 내려 갈 것이니 그 쪽으로 오라며 나를 부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말 등에 실린 것은 큰 눈을 껌뻑이고 있는 어린 송아지 두 마리였다.

내가 마당에 당도하자 출발할 채비가 거의 끝난 듯 했다. 


여자에게 다녀오마는 인사도 없이, 내게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남자는 말고삐를 빠짝 당겨 잡고는 앞서서 걷는다.
그렇게 당겨 끌지 않더라도 잘 갈 수 있을 텐데... 말이 불쌍했다.
계곡물을 건널땐 말도 발이 미끌려 무릎을 거의 꿇을 뻔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했다.


앞서 걷는 걸음이 어찌 빠른지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오르막길에서는 심장이 아팠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깎아지른 바위산들 사이로 난 좁은 길로
올라왔던 반대편 길에 비해 좁고 거칠었다.

낙차가 큰 탓에 계곡물소리가 크게 들렸다.


쫓아가기가 버거워 한참을 뒤쳐지자,
그가 보폭을 조절하여 날 기다려 주었다.

그래도 자꾸만 뒤쳐지자 결국 그는 말을 앞서 보내고 나를 기다려 함께 걸었다.


'송아지들이 아픈거냐? 왜 싣고 가느냐'고 물었다.
"팔려고 가져간다" 그가 대답했다. 
'어디다 파냐'고 물었더니 '식용으로 판다'했다. ................불상한 녀석들.
말등에 올라타고 유람가는 녀석들이 부러웠었는데, 그 부러움이 순식간에 불쌍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이 어린녀석들을 어떻게 먹냐고 따지듯 물었더니
'어린 송아지가 식감이 좋다'고 했다.


하기야, 고급호텔에서는 어린 송아지 요리가 고급 메뉴로 나온다고 들은적이 있었다.


한마리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300위안이란다.
삼백위안이면 우리돈 5만원 조금 넘는 돈이다.
이런 싼돈에 이놈들을 고기로 판다니.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도 존중해 줘야했다.


'산 위에서 내가 본 소들이 다 네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그럼 참 부자네...'
그 친구, '자기네 여관도 있다'며 폰으로 사진을 보여준다.
돈 안받을테니 나보고 얼마든지 머물다 가라고 한다.
 










목 좁은 통로를 지날 때 그는 나무로 된 바리케이트를 손질했다..

산 위의 소들이, 좋아하는 풀도 얼마 없는 이 곳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려오면 이 쯤에서 차단하기 위함인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높고 큰 바위 산들 사이로  난 좁고 깊은 계곡으로 이어져 있고 가는 길마다 새로운 장면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산이 끝날듯 끝날듯하면서 이어지고, 지칠대로 지친 내가 그 좋은 풍경들이 지겨워질 무렵, 저 멀리 시야가 틔인 곳이 나타났다.


마을이 보였다. 이젠 정말 다 내려왔나 보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오던 길 우측에 있는 산책로 코스의 전망대로 가는 길과 맞닿아 있다.


산행에 힘을 소진한 나는

짜가나 마을과 그 주위를 내려다 볼 있는, 야생화가 군데군데 핀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이 친구가 권하기도 했지만 나 또한 생각같아서는 여기서 며칠더 머물렀으면 했다.
하지만 며칠 뒤 나는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로 연락하자며 웨이신아이디를 교환했다.
이 친구가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84년 6월 1일 생,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

자고 가지 못하더라더라도 자기 집을 보여주고 싶다고 붙잡는 바람에 그를 따라 마을에 있는 그의 여관으로 갔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1층은 식당과 생필품을 파는 가게를 겸하고 있었다.
현대식 여관 뒷편의 마당 건너편엔 그의 부모가 거하고 계신 그들의 전통가옥이 있었다.


가옥 입구에 들어서면서 벽의 단면을 볼 수 있었는데, 거의 1m 가까이 되어보이는 두꺼운 흙으로 지어진 벽이었다. 이런 두꺼운 흙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막기에 안성맞춤일 듯 했다.




그는, 가족이 사용하던 오래된 사냥총을 내게 쥐여주고는 모자도 씌워주었다.
집안의 부모님과 마당에서 무언가를 씻고 있던 자신의 아내와 아기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그냥 가기 뭣해서 1층에서 저녁을 시켜서 먹었는데,
식사 후 카운터에서 계산하려고 밥 값을 묻는데,
그가 끼어들어 한사코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다음번에 꼭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아쉬움을 대신하는 약속을 하고는 짜가나 마을을 떠났다.



다시 데부현으로 돌아와서 전날의 그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피곤했지만 어제 그 젊은 친구들을 만나러 '누군가 까페'로 갔다.


서빙하던 친구와 처음보는 또다른 새로운 친구가 함께 있었다.
인사하고 맥주를 시켰다. 잠시 뒤 어제 만났던 또 다른  한 친구도 합류했다.


오늘 새로운 친구는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녀의 책을 본 것을 자랑삼아 얘기했다.


난 그녀가 지금 구속상태라고 얘기하고, 그녀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는 약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니'라고 대답했다.
박대통령 외에 다른 대한민국 대통령을 아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혹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 아냐고 내가 물었다.
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세명의 중국 친구들은, 박근혜는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난 그녀의 아버지가 일본장교 출신이라는 것과, 한때는 공산당에 몸담았고 동료들을 팔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며,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것과 그를 반대한 많은 사람들을 탄압하고 죽인 것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세 친구는 얘기하는 내내 타블렛과 핸드폰을 켜놓고 웨이신을 하고 있었다.
타블렛 pc를 보자했는데, 웹브라우저를 어떻게 켜는지 알 수 없었다.
얘네들은 인터넷 보다도 웨이씬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하고 있는 듯

타블렛 PC에서는 내게 익숙한 웹브라우저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맥주는 내가 쏘기로 했는데, 이 친구들은 내가 술값을 내지 못하게 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작별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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