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창고를 정리하다 바닥에 깔린 박스를 발견했다.
그건 내 일기장과 과거의 편지를 모아놓은 박스였다.
그런데 한 귀퉁이가 젖어 있는 것이다.
급하게 열어 젖혀보니 여름내 습기가 베어 온통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박스를 방안으로 옮겨 바닥에 넓게 펼쳤다.
내용이 완전히 지워진 편지들, 한귀퉁이만 겨우 남아 아련한 추억의 일부를 일깨우는 사진들
오랫동안 버려지고 잃어져 겨우 남겨진 나의 유물인데
이것마져 이렇게 또 망가지게 뒀으니 참으로 속상했다.
그나마 살려낼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시커멓게 핀 곰팡이를 닦아내고
방안가득 추억의 편린들을 흩어놓은 채로
보일러를 켜고 선풍이를 돌렸다.
습기로 인해 엉겨 붙은 낱장을 분리해 내는데
종이에 담긴 내용들이 나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호택 오빠..."로 시작한 편지글.
나한테 이렇게 부르며 편지한 이도 있었던가?
한참을 읽었지만 도대체 누가 보낸 것인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끝 부분에는 "란 으로부터"라고 쓰여있었다.
그런 편지가 여러 장 발견되었는데, 몇 장의 편지를 발견하고, 겉봉을 확인하고서야
그게 군대시절에 받은 편지이며, 대학 때 농활서 만난 당시 여중생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별로 오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당시에는 서로 적지않은 편지를 주고 받은 것 같은데
내 기억에서 끄집어내어질 때까지 그렇게 한참이 걸렸다는 게 이상했다.
내 관심이 과거의 사진으로도 가고 일기장으로도 가고.
그렇게 난 창고정리를 접어둔 채로 펼쳐놓은 추억들로 빠져들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죽은 새끼염소를 묻어주고 슬퍼하며 썼던 글들,
중, 고등하교 시절 이성에 눈 뜨며 가슴설레였던 이야기...
심여년 전
아내에게서 받은 쪽지를 통해서는,
당시에 서로 사랑했던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아한 것은 글을 읽기 전까지 한때 아내와 행복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다는 점인데
이 시점에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지 못했다면 어쩌면 앞으로 내내 오직 미움의 대상으로만 아내를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덕분에 난, 아내와의 기억을 행복했던 추억으로도 가슴에 묻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글을 읽으며
아련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그렇게 아름답고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 추억이 소중한 존재로서의 나를 일깨운다.
여전히 난 사랑받고 존중받고 행복받아야 할, 그럴 가치있는 존자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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