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생일

아르쎄 2012. 8. 31. 23:17

월례회의 시간에 임원의 모두발언이 있었다.
직원들을 상대로 복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었었는데 거기에 관한 얘기였다.
회사로부터 바라는 점을 묻는 설문에서 생일챙겨주기가 제법나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은 어릴적 부터 생일을 챙겨먹을 형편도 되지 못했을 뿐더러
챙겨 먹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생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갑자기 그 임원이 하는 얘기가 내가 평소하던 얘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난 20살까지 생일을 챙겨먹은 기억이 없다.
성인이 된 뒤 돌아가신 아버지의 수첩에 적힌 기록을 확인하기 전까지
생일이 언제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초를 꽂은 케잌을 앞에두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서양에서나 익숙할 것 같은 그 행위에 대해
냉소해 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임원의 얘기가 별로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그 임원의 어려웠던 어린시절 사정에 동정심조차 일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행복을 애써 멀리하려는 차가운 그의 가슴에 대한 동정심이 일 뿐이었다.

나 또한 지금까지 그렇게 바보같은 얘기를 떠들면서 나를 남과 다른 특별한 인물로 보이려고

부질없이 애쓴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웟다.

 

사실 생일이라는 날은 일년중 평소와 별 다르지 않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해가 뜨고 지고, 어제처럼 비슷한 풍경의 자동차가 지나가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언젠가 부터 나는,

생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날인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생일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자신에게만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삶에 있어서 별로 주인공이 될만한 일이 없는 나같은 사람도
그날 하루만큼은 주인공인 것이다.

요즘은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의 생일이 자동으로 알려진다.
그러다 보니 생일날에는 여기저기서 축하전화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 같으면 '쓸데없이 왜 전화했냐"했겠지만
이젠 전화를 받고 기뻐하고 고마워하고 또한 행복해 한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생일을 맞는다면,
난 그를 찾아가 "생일 축하해"하고 말해 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며칠 전  일때문에 다툰 후로 서로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회사의 동료일 수도 있고
몇달동안 안부전화 한통 드리지 못한 나의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생일을 기회로,
축하와 감사를 주고 받으며 다시 한번 상대와 가까와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너에게 나는, 나에게 너는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켜주고 인식을 받으며

서로는 사랑하는 사이임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작년 생일은 많이 힘들었었다.
저녁에 회사에서 케잌을 사주었다.
집에가서 가족들과 즐겁게 생일파티를 하라고.

그날 집에는 일찍 갔었지만 아이들은 친구네 가고 없었고
네 가족이 사는, 텅빈 집에서 혼자 잠자리에 들었을 뿐이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지만 일 때문에 출근을 해야했다.
일요일 낮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테이블에 있는 케잌, 애들과 먹어도 돼?"
"그래 먹어"

 

저녁에 집에 가니,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그런데 식탁위 케잌은 내가 어제 올려둔 그대로였다.
"왜 안먹었어?"
"아빠 생일케잌인데,... 먹을 수가 없었어."

.................

"단풍잎, 우리가 생일 축하해 줄게"
옆에 있던 딸아이 친구가 말했다.

케잌을 상자에서 꺼내 촛불을 켜고 전등불을 껐다.
아이들이 모여서 생일축하 노래를 신나게 불러주었고
내가 촛불을 끄자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축하인사를 해주었다.

 

가장 쓸쓸하게 시작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축하를 받은, 정말 기억에 남는 삼십대 마지막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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