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날 때 온전한 알몸이다. 욕구에 대해서도 배고프면 울고 행복하면 웃고 싸고 싶으면 싼다.
온전한 모습에는 연기가 필요 없다. 고통이 오면 찡그리고 기쁠 땐 웃으며 있는 그대로를 표정으로 나타낸다. 엄마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서 웃고, 엄마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싼다.
벌거벗은 아이가 한 겹, 두 겹 자신의 몸을 무언가로 감싸고 차차 옷을 입는 것과 함께, 서서히 역할 연기를 시작한다. 먹을 게 필요하면 자신의 배고픔을 가식적으로 연기해 내고,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억지 미소도 지어 보이기 시작한다.
연기에 몰입한 나머지 이게 연기인지 실제인지조차 분간해내지 못하며.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나름 역할 연기를 열심히 해내고 있다. 자신의 실체는 관계라는 배경속에 숨긴 채. 가족에게는 아버지로서 근엄하고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자식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고 고민해 준다.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 ‘올바른 방향’에 대해 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며 때론 강요한다.
군에 있을 때, 난 정말 역할 연기에 온전히 몰입된 선임병을 만났었다. 내가 보기에는 별로 바른 삶(국가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는 정말 국가의 안보를 걱정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후임병들에게 수시로 ‘군기가 빠졌다’ , ‘이래 가지고 나라를 지킬 수 있겠냐’, ‘니네들이 진짜 군인 맞냐’는 등의 말을 쏟아 부으며 군에서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빠따질’을 아주 자주 하곤 했다. 그게 금지된 행위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국가 안보를 지키고 군대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불가피한 행위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내 느낌으로 본다면 그는 입대 전부터 군과 나라를 걱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말 안보를 걱정했다면 하사관으로 말뚝을 박던가 했을 것이지만 결국 그는 아주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전역을 했다. 그는 군복을 입음으로 해서 자신과 전혀 다른 실체인 군인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한 것이다. 그 연기가 지나친 나머지 자신의 실체를 잊은 채 마치 그 역할이 자신인 양 실체와 동일시 한 것이다.
우리는 ‘관계’가 실체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형이고, 임의로 정해놓은 단위 기간(1년)에 태어난 사람은 친구이며, 그 보다 나중에 태어난 사람은 동생이 된다. 그러다 보니 한달 먼저 태어난 사람은 형이 되고 11달 늦게 태어난 사람은 친구가 되는 모순이 있음에도 형의 역할과 동생의 역할을 정해 연기에 충실하고 있다.
대학 때나 사회 생활에서 흔히 겪는 일. 다같이 동기인줄 알았는데 고교 선후배 사이가 썩여있어 같은 대학동기임에도 그 안에서 맺는 또 다른 어설픈 관계.
또 다른 경우: 사회에서 1살 차이라 친구 먹기로 했는데, 그 친구보다 1살 많은 사람까지, 또 친구의 친구보다 1살 많은 사람과 같이 친구 먹기로 해서 다같이 친구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나보다 세 살 많은 친형의 학교 동기가 되어 족보가 꼬이는 경우.
실체는 나와 태어난 시점의 차이일 뿐 그 시점을 구분하여 배역을 나누는 것은 실체와 상관없이 부여된 임의적인 역할일 뿐인 것이다.
얼마 전 젊은 판사가 노인에게 ‘버릇없다’고 말한 것이 화재가 되었다. 그 판사는 자신에게 부여된 존칭인 ‘영감’의 연기에 충실했던 것일 뿐이고, 그 노인은 피고 연기에 충실했던 것일 뿐이고, 그 것에 대해 비판한 인사들은 사회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래도 이게 연기가 아닌 실체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실제 연기라고 하는 것들을 보자. 어제 난, 영화 ‘심장이 뛴다’를 보았다. 김윤진과 박해일의 연기는 정말 신기에 가까웠다. 특히 죽어가는 딸에 대한 슬픔의 연기를 완벽하게 해낸 김윤진의 연기는 보는 이의 눈시울을 붉히기에 충분했다. 영화에서 김윤진이 흘린 눈물은 연기였을까 아니면 진짜 자신의 감정까지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감정의 움직임이 눈물로 나타났다면 어디까지가 김윤진의 실체이고 어디까지가 배우로서의 연기일까?
키스씬이나 애로씬에서 누가 보아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완벽녀와 완벽남인 두 배우는 정말 객관적으로 연기만(?) 하는 것일까?
심리 치료 방법의 하나로서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족 세우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처음에는 가족 문제의 치유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였는데, 우연히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가족이 모두 참여해야 할 프로그램에 간혹 구성원이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그 빠진 구성원의 역할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되었는데, 원래의 구성원의 성격이나 그 가족의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 하는 대리배우가 그 구성원의 역할을 너무 완벽하게 재현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아예 실제 문제의 가정은 현장에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역들로만 가족을 구성해서 자유롭게 역할 연기를 하도록 했더니,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를 하게 된 대리역들이 그 가족 구성원의 실제 인물들과 아주 유사한 역할을 해냈으며 심지어 그 가족의 문제까지도 실제에 가깝게 재현해 내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실체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환경에서 이미 주어진 역할에 따라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 대본을 가진다면 똑 같은 연기를 하게 된다. 자신의 현재 모습, 성격, 생각하는 방식 조차도 실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우리는 실체와는 별도로 주어진 배역에 따라 연기(생활)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부하직원을 거느리는 근엄한 팀장으로, 선배 앞에서는 귀염 받는 재롱둥이로, 세미나 현장에서는 심각 모드의 캐릭터로, 교회에서는 믿음의 확신에 찬 신자로 말이다.
문제는 연기에 대한 몰입이 클수록 실체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는 데 있다. 역할 연기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감정이입이 되고 그 감정이 정말 내 것인지 대본의 것인지 조차도 잊은 채.
역할 연기에 충실토록 강요하는 사회는 결코 개인이 존중 받을 수 없으며 오래가지 못한다. 과거 태어나면서부터 역할이 정해졌던 봉건재 사회의 모순을, 현재의 우리는 너무나 또렷이 잘 알지만 과거의 그들은 그것을 실체로 착각하여 당연 시 받아 들였다. 죽을 때까지! 신의 뜻을 수행하는 역할에 충실했던 중세 성직자들은 수 십만 명의 ‘마녀’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때론 수 백 명이나 되는 온 마을의 모든 여자들이 종교재판에서 마녀로 판정 받고 불태워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연기에 몰입한 어떤 이는 버릇없는 아들과 순종하지 않는 아내에게 수시로 매질을 해댄다.
상실감의 연기에 너무 집착한 배우는 결국 스스로 죽는 연기마저도 너무 완벽하게 해내어 자신의 실존마저도 없애버렸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칸트는 자신의 이성(생각도 역할이다)마저도 비판했으며,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다. 석가모니는 모든 것을 허상이라 하며 순수 존재를 찾는 ‘해탈’을 가르쳤다.
모두가 역할연기로부터 온전한 자신의 존재를 찾아야 한다고 얘기했던 것이다.
배우는 연기를 하지 않고는 먹고 살수 없다. 실존 또한 허상인 역할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연기는 연기로 수행해야 한다. 그 연기가 마치 실체인양 의지적으로 속이거나 정말 몰입되어 실체를 잊어버린다면 인간은 결국 스스로 만든 세트장에 갖혀 죽게 될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이 맡고 있는 모든 배역들을 돌아보고 실체로서 한발 물러서서 자신의 배역에 대한 비평을 해 보기를 바란다.
지금 고통의 연기를 하고 있다면 자신의 완벽연기에 박수를 보내고 웃어보라. 크게 소리내어 웃어도 좋을 것이다. 지금 행복의 연기를 하고 있다면 그 배역에 감사하라.
모두 다 멋진 배역을 맡을 수는 없다. 주인공이 필요하면 조연도 필요하다. 대본도 마찬가지로 해피엔딩 스토리가 있으면 비극의 결말을 담은 스토리 또한 있다. 좋은 대본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고 우쭐댈 필요는 없다. 대본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므로.
나와 다른 배역을 맡고 있는 다른 존재에 대한 실체 또한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실체로서의 ‘나’를 잊어서는 안된다. 존재의미에 대한 고민마저도 그저 존재하는 온전한 존재로서의 나 안에서는 하찮은 것이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퇴근길_반지 파는 아저씨 (0) | 2011.01.20 |
---|---|
설국, 부안 (0) | 2011.01.19 |
천사 조나단 (0) | 2011.01.06 |
출근길_쪽달(조각달) (0) | 2010.12.29 |
퇴근길(반달) 12/14 (0) | 2010.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