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언어의 변천

아르쎄 2023. 12. 17. 10:43

언어는 정말 살아숨쉼다. 특히 요즘에서는 그 사용하는 어휘의 변화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보니 

특정 언어를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세대를 나누는기준이 되기도 한다. 

내 어릴적 흔히 사용하던 어휘들도 많이 없어지거나 의미가 바뀐 사례가 많다.

사극에서나 보면 '예'라는 대답 대신 '야'라는 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나의 초등학교 때까지 '예'라는 대답은 표준어가 사용되는 드라마 속에 서나 듣는 말이었지 일상의 말이 아니었다. 

바보같은 '표준어 사용을 생활화 하자'는 구호 아래 서서히 '야'는 '예'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시절 같이 초/중 학교를 다녔던 내 친구들 대부분은 우리가 그런 촌스런 대답을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지 조차 못했다. 

그것은 우리 이전 세대였고 우리는 그 이후 세대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한 사건의 기억은  그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한 친구가 선생님의 대답에 '예'로 답하지 않고 '야'로 답했다는 이유만으로 싸다구를 맞았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봤던 충격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94년도 군입대전에는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 후배가 정말이지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
후배들은 남자 선배들에게 모두 ‘형’이라고 호칭하거나 소수가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사실 ‘선배’라는
호칭도 행여나 특정인물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호칭이었다. 오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할라치면 후배는
‘친오빠도 아닌데 어떻게 오빠라고 부르나’면서 거부했다.

 

그러던 것이, 제대후에는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어떤 여자 후배도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학원에는 아직 입대전에 같이 학교생활을 하던
여학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여전히 교정을 누리고 있던 터라 세대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할 수도 없는
기간이었지만 ‘형’이란 호칭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더 어색했던 ‘오빠’라는
호칭이 대신했다.

 

세월의 변화와 함께 그 표현적 의미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

 결혼한 여자를 일컬었던 ‘아줌마’가 아닌가 한다.
인터넷 포탈사이트의 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성인여자를 가볍게 또는 다정하게 가리키거나 부르는 말.
결혼한 여자를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지금은 어느 ‘아줌마’도 그렇게 불려지기를 원치않는다. 행여나 그렇게 불려질라 치면 소스라치게 화를
낸다. 그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는 것아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아줌마’로 불릴 연령을 훨씬 초과한 ‘할머니’들 조차도 오히려 젊게 불려져서 기분좋을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 호칭을 반기지 않는 눈치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아줌마는 완전히 실종된 듯 하다. 그래서 '아줌마'를 현재 인식되고 있는 의미로 재
정의해 본다.
아줌마 – 나이든 여자 혹은 결혼한 여자를 낮춰서 또는 비하하여 부르는 말.


이모, 이모 또한 그렇다. 정확한 의미는 엄마의 자매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모란 말만큼 현재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먼저 요즘같이 한자녀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혈육으로서의 ‘이모’란 의미는 서서히 사라져 가고 엄마의 친구
또는 엄마 또래의 여자를 일컫는 의미로 바꾸었다.
또한 식당에서 불리는 이모는 서빙하는 아줌마, 그리고 그것 때문애서인지 일상의 사람관계에서의
이모는 위에서 재정의한  ‘아줌마’ 정도의 의미가 되었고,
아줌마와의 동의화 과정 때문인지 이젠 성인으로 부터 이 호칭을 듣고 마땅해 하지 않는 여자들이 늘고
있다.


새로운 호칭을 또 만들어야 되나?
어떤 호칭이든 그 호칭이 결혼한 여자 또는 나이든 여자를 일컫는 의미가 굳어진다면 이 또한 머잖은 미래에  다른
호칭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감성이 여성의 호칭보다 덜하긴 하지만 남성에 대한 호칭 또한 분명히 변했고 변하고 있다.
아저씨. 내 어릴적이면 스물만 넘어도 내 눈엔 아저씨였고 그렇게 불렀다.
내 나이 벌써 쉰이다. 지금 누가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다면,… 실제 들어본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솔직히 좀 어색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보다 연상이신 남자 분들을 그렇게 부르는 건,.. 예의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과거엔 당연했던 것이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라는 용어 또한 친족들이 아닌 한 누구도 그렇게 불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르신’이란 용어로 바뀌었다. 제법 들음직하게 들리긴하지만 현재는 그 용어가 처음 권장될 때만큼
사용되지 않는다.
어르신들께서도 스스로 어르신 축에 끼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다는 것을 알기에 어르신은 단지
연세드신 분들의 집단을 칭하는 것으로 한정할 뿐, 혈육 이외의 관계에서 호칭으로서의 지위는 이미
사라지고 있는 듯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오빠'는 어떤가. 요즘엔 친오빠와 외출나가서 친오빠를 '오빠'라 부르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괜히 주변 사람들이 연인이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꺼림직한 생각때문이다. 
하기야, 요즘에 있어서 오빠라는 명칭은 이미, 여성이 연상의 이성연인 내지는 남편을 부르는 호칭이 되어버렸고, 
이젠 드라마나 영화에서조차 이 호칭이 과거의 '여보', '당신','자기' 를 대신한지 오래다.

그럼 정말 혈육의 오빠는 남들 앞에서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까?. 난감하기 그지 없다.  


좋다. 인정하기 싫은 부분들이 담긴 이러한 호칭들은 그 듣는 이들이 대하는 태도로 인해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사극 드라마에서 남자 선임을 보고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듯, 의미를 바꾼 언어는 현재에서
이미 주인행세를 하여 원래의 의미를 어색하게 또는 웃음 거리로 만들었다.

 

하지만 적당한 지칭가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그 언어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이를 인간의 부적절한 판단, 심하게 말하자면 판단오류라고 하고 싶다. 교양있는 척 잘난척 하기 위해
범인들과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바람에 범인들 조차 그들을 쫒아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무식한
인간으로 여겨질까봐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그것들이다.

 

가장 크게는 성에 관련된 용어가 그것이다.
자지, 보지-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각각 일컫는 용어로, 구태여 ‘성기’라고 표현해야 되는가 하는 거다.
외래어를 빌어 고상한 듯 보이지만 한문의 뜻을 해석해 보면 오히려 더 무식이 빛날 표현 ( 성의
도구, 성행위에 사용되는 도구, 씹에 쓰이는 도구)이 아닐 수 없다.

 

한때 아이낳는 것을 ‘생산’이라고 표현했다. 생산은 살아있는 것을 낳다는 제대로 된 표현이 맞다. 하지만
‘낳다’라고 해도 될 것을 ‘생산’이라고 한 것은 식자들의 유식을 한자어를 사용함으로써 자랑하려는 데서
나온게 아닐 듯 싶다. 산업화가 되고 생산의 의미는 제품의 생산으로 확대되었고 드디어 ‘살아있는 것을
낳다’라는 본래의 의미는 물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거로 바뀐거나 다름없다.
씹 – ‘섹스’라는 표현이 고상한 건지, 성교/성행위라는 표현이 고상한 건지. 우리는 왜 순수한 표현을 남을
비난하는 욕설에만 사용할 뿐 일상에서는 버린 것일까? 유교문화의 지속이 이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저속으로 여겨, 외래어 표현을 빌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고상하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젖꼭지 – 꼭 ‘유두’가 더 나은 표현이어야 하는가?
극단적 시도 – 난 도무지 이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극단적 시도는 여러분야에 사용될 수 있고
사용되어야 언어적으로 그 가치를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 똑똑한 자들이 ‘자살’에 이 표현을
고집함으로써 극단적 시도=자살 이라는 등식이 이미 성립해 버렸다.

자살 대신 극단적 시도라는 표현을 쓰면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가 더 줄어든다고 믿는 것인 것인가?
하지만 왜 나에게는 ‘극단적 시도’라는 표현이 더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이미 초딩들도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데, 앞으로 ‘극단’이란 단어은 쉽게 못할 금지어가 되어버린 게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어떠한 언어가 사라질 수는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포괄적인 단어를 대체할 또 다른
용어를 개발하고 사회적으로 합의할 때 까지의 비용은 어떻게 치를 것인가?

 

나는 언어학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