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샌드백과 쫌생이와 자유인

아르쎄 2022. 6. 26. 19:49

나는 이들을 샌드백이라고 부른다. 
학교에서 흔이 왕따로 일컬어 지는 이들. 
힘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상대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유전자의 다양성 게임에서 흔히 착한 유전자로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당하지만 보복하지 않는다. 

 

이걸 아는 놈들이 이 샌드백들을 자신들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삼는데, 
이런 놈들을 어떻게 명명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쫌생이, .. 양아치... ?

 

내가 의도하는 뉘양스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인

양아치로 하자. 


양아치들은 자신들의 폭력을,

샌드백들이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항상 정당화 한다. 

그들은 간혹 바위를 본다. 

하지만 주시하지 않는다. 
길 한가운데서 통행을 가로 막고 있는 바위를 인식한 걸 누군가 알게 된다면

' 그걸 왜 그냥 두고 피해 가냐'는 질문을 받을 까봐 두려워

아예 인지하지 않은 척, 먼 산을 보며 지나간다. 


샌드백에는 주먹질을 할 수 있지만

바위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에도, 그럴 만한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양야치라는 이름 조차도 그들에게는 과분한 감이 든다.

그냥 쫌생이로 하자.

 

샌드백과 쫌생이 사이에 수많은 보통사람이 있다. 

그 샌드백과 쫌생이 사이에 끼기를 피해가는 보통사람들. 

쫌생이들이 아직 자신이 샌드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에 안도하지만,

언젠가는 알아버릴거라는 불안감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대부분이다 싶다가도,

어쩌면 샌드백이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쫌생이들을 꾸짖으며, 

샌드백들에게 저항할 힘을 주고

살아갈 희망을 주는 벗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멋있는 자유인이, 나도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