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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

아르쎄 2020. 7. 16. 21:37

팽창해 가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당시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를 상대로 1592, 키프로스 섬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해전을 통해서 당시 중동, 아프리카, 동부 유럽을 차지하고 세를 키워가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팽창은 여기서 멈추게 된다.

당시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의 이러한 팽창은 지중해를 면한 유럽 나라들에 있어서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오스만과 해상으로 대치하게 된 교황과 베네치아, 몰타, 그리고 나폴리와 시칠라아를 소유하고 있어 위협된 제기된 스페인, 그리고 육지에서 대치하던 신성로마제국이 연합국을 형성하여 오스만투르크에 맞서게 된다.

 

당시 전쟁해서 주력이 된 배는 갤리선’은 주로 노를 젓는 방식으로 기동되었다.

평균길이 40m, 평균배수량 140ton 정도로, 대포의 발명으로 과거에 있었던 충각이 사라졌다. 당시 대표로는 배를 격침시키기는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포의 주요한 용도는 상대편 배의 노를 부셔뜨려 기동력을 없애는 것이었다.

전함인 갤리선에는 장교10여명, 선원 15, 노잡이 145, 그리고 전투요원이 30~180명 정도 승선하였다.

노를 저어 가는 방식인  승조원은 대다수가 노잡이였으며, 연합국의 노잡이는 주로 죄수, 그리고 오스만의 노잡이는 이교도 즉 기독교 노예가 대다수였다.

 

오스만투루크의 갤리선과 연합군 각국의 갤리선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페인은 크고 무거운 갤리선이 주였던 반면, 이탈리아의 갤리선은 적당한 크기로 원거리 교전에 유리했다.

이에 반해 오스만은 대포의 적재수가 적은 작은 함선이 주였다. 이는 당시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던 백병적을 위한 다수의 병사를 실어나르는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오스만의 갤리선에는 청동대포를 장착하였으며, 전투 시 오스만의 병사들은 화승총이 있었으나 수량이 많지 않았고 주로 복합궁을 사용하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200여척의 배를 한번에 건조할 수 있는 대형 조선소가 있었는데, 이 조선소는 배 뿐만아니라 모든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군산 복합단지라 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새롭게 개발된 무기 및 적재되는 모든 재품의 사양에 맞게 배를 디자인하고 표준화하였다. 별도의 품질관리 위원회를 둘 만큼 표준화를 이뤄서 배의 생산 뿐만아니라 수리 및 유지관리를 아주 용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배에 설치되는 대포 또한 청동재로 만들어 당시 연합국의 화력이 오스만의 그것을 능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한 번 쏘면 열로인해 포신을 12시간이나 식혀야 했던 단점을 개량하여 약실을 분리하여 교체해 가며 사용할 수 있는 포를 개발하였다. 이는 재장전하여 다시 쏘는 데는 유리했으나 팽창가스의 유실로 인해 포탄의 비행 거리가 짧아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를 개선하여 포신의 중앙에 약실을 둔 하프캐논, 그리고 1사람이 사용하여 가까이 오는 적병을 제압할 수 있는 소규모 화포인 에스메릴등을 개발하였다.

 

이탈리아가 기술개발을 통해 전술을 개량해 나간데 반해,

오스만은 그동안 부의 원천을 상업에 둔 탓에 제조업에 기반한 기술개발에는 관심이 소홀하였다. 필요한 물자는 무역에 의존한 까닭에 기술력이 유럽보다 낮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스만투르크가 키프로스를 공격하였지만 파마쿠스타성은 1년 이상이나 버티게 된다. 키프로스 섬의 오랜 저항이 결국 연합군에게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술레이만이 항복조건을 제시하여 성을 차지하지만 오스만은 조건을 무시하고 총독을 산채로 가죽을 벗겨 죽인다. 이는 오히려 키프로스인들게 결사 저항 의지를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유럽연합 함대는 4대의 함대로 구성되었고 각기 사령관이 따로 있었다. 이에 반에 오스만의 함대는 총사령관 알리파샤가 이끌었다.

스페인의 26세의 돈후항이 이끄는 유럽연합 함대는

북쪽 지역 전쟁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중앙과 남측에서 승리하여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제압하였다.

 

중앙에서는 전술을 잘못오해한 '몰타기사단'이 적에게 몰리고 있을 때, 각자 전립품을 끌고가던 도리아 군을 포함한 연합국 함선들이 전립품을 포기하고 몰타기사단을 구할 만큼 연합군의 단합은 굳건했다,

 

주로 백병전으로 이루어졌던 이 전쟁은 참으로 참혹하였다고 전한다.

 

이 전쟁에서 특이한 점을 하나 들자면, 남쪽의 전투에서 오스만의 병사들이 유럽연합의 배에 올라 백병전을 시도하던 중 수세에 몰린 연합군의 배가 자폭을 하여 많은 오스만 병사들을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수장한 것이다.

 

이는 화약의 상용화로 인한 것으로 이후 해상전의 양상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 된다.

기존의 백병전의 방식으로는 이러한 함정에 얼마든 빠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는 백병전 보다는 적을 원거리에서 섬멸하는 함포 등 장거리 무기로 싸우는 방식으로 진화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의 총사령관 알리파샤는 끝까지 활로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화살이 떨어진 후 도망가지 않고 칼을 빼어 들고 백병전에 뛰어들다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전한다.

연합군의 사령관 돈후안은 죽은 알리파샤의 목을 잘라 높이 들어 올리자 오스만함대의 사기를 잃고 전쟁에서 패한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 참전자 84천명중 15천여명이 전사한 반면, 오스만은 88천명의 참전자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오스만의 갤리선 118척이 침몰했으며, 117척이 연합국에 나포되었다.

 

연합군의 사령관 돈후안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뛰어난 지략을 보였는데, 각 함대에 각기 다른 국적의 배를 썩어 연합군의 분열을 방지하였다.

물론 각기 다른 색채를 지닌 이들이 하나의 함대로 구성되어 처음에는 다툼이 많았다 하는데, 돈후안은 그때마다 서로를 설득하여 화해 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돈후안은 다른 사령관과 달리 자신의 전술을 자신의 휘하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등 자신의 지위를 위엄으로만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남을 설득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는데에 유능하였다.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유럽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라 불린다.

이 해전 후 화약의 발달로 해전의 양상은 백병전에서 화포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으며,

항해술이 발달하여 해상력이 와해된 오스만 함대가 사라진 조용한 지중에 바다로부터 무게의 중심이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 선두에 선 것이 바로 스페인으로 식민지 개척을 통해 금과 은을 거둬들이고 그리고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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